아버지 당신도 영 멋부리는 데는 재주가 없어, 딸자식 옷 입는 덴 별 말씀 없으셨는데 요즘엔 자꾸 구두 하나 사주마 하신다.
“에이, 아빠는, 구두사면 맞춰 입을 옷도 없는데”
(불쌍한 우리아빠. 당신은 아마 내가 사랑한 유일한 남자일 텐데. 안타깝게도 당신이 사준 구두를 신을 일은 없을 것 같아)
“옷도 한 벌 사줄끼다. 니도 이제 아가씨 아이가. 애도 아이고 언제까지 그렇게 다닐끼고”
그렇지 . 이젠 애도 아니다.
엄마에게 커밍아웃 한지가 2년이 다 되어간다. 3년을 벼르며 빠삭히 준비해 온 커밍아웃인데, 결국 그날은 울기만 했다. 그래도 그만큼이라도 얘기해버릴 수 있었던 건 그나마 내가 ‘더 크지 않았기 때문’ 인지도 모른다. 그날 저녁엔 담담히 받아들이는 줄로만 알았던 엄마와는, 그 담날부터 내리 1년을 싸웠다. 아니 - 싸웠다기 보다 누가 더 아픈가를 토해냈을 뿐 -이다. 작년 겨울이 되어서야 비로서 휴전이다. 아무것도 끝나지 않고 ‘널 받아들일 수 없어 그러나 나는 너를 사랑해’ 같은 암묵적인 조약만 남았다. 나의 정체성은 상호불가침 구역이다. 결국 1년 동안 싸우며 빽빽이 울었던 걸 제외하면 커밍아웃은 다시 하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 날 엄마는, “네가 무얼 하고 어떻게 살던 간에, 네 할 일부터 해. 그래야 네 말을 다른 사람이 들어주는 거야. 지금 너는 수험생이잖아” 하셨다.
글쎄, 나는 그 말에서 “수능이 끝나면 대학 생활을 해야 하니까, 대학을 졸업하면 취직을 해야 하니까, 취직을 하고나면 승진도 하고 돈도 벌어서 집도 사야 할 테니까, 그러니까 넌 그때까지 너를 숨겨야 할거야. 그렇지만 직장도 있고 돈도 있고 집도 있는 사람이 결혼을 해야지 뭐가 부족해서 ‘그거’로 살려고 하니?” 를 읽었다.
물론 한 여자가 한여자를(엄마가 나의 사랑하는 여자를 혹은 여자를 사랑하는 나란 여자를) 인정하게 될 날이 생각보다 가까울 수도 있다. 그러나 솔직히 이젠 내가 그때만큼 자신이 없다. 나 혼자서는 나를 지키며 살 수 있겠지만, 나를 드러내며 살기에는 고작 2년만에 더 힘들어졌다.
여고를 다녔었는데, 학교를 다닐 땐 철없이 반 전체에다 커밍아웃을 했었지만 잘 살아남았다. 그런데 지금 다니는 학원 친구들은 나를 “연하남을 꼬신 능력자”인줄로만 안다. 사실 키를 조금 속인걸 빼면 딱히 거짓말 한건 없다. (눈썹이)잘생긴건 사실이니까. 애인이 남자라고 얘기한 적은 없으니 착각은 자유라고 위안하기엔 좀 켕긴다. 하지만 같은 반 남자애들이 레즈비언을 야동에서만 봤는지 어쨌는지도 알 수 없고, 키스는 어떻게 하는거냐며 묻던 친구들도 내 연애를 더 이상 궁금해 하지 않을거다. 애인이 여자라고 밝히는 순간 ‘여자애인인 주제에 그것도 연애라고 자랑하는 찌질이’가 되 버린 많은 경험들처럼 지금의 달콤한 권력을 잃을까봐 두렵다. 오랜 친구들 만나는 것도 부담이 된다. 어느 것 하나 지기 싫어하는 나는, 친구들이 그렇게도 손쉽게 ‘아가씨’에 편입해 버리는데 나만 주저앉아 버린 느낌이다. 파우치며 귀걸이며 하나도 부럽지는 않지만, 어쩐지 내가 초라해 보일 것만 같다.
정장 치마대신 넥타이를, 하이힐 대신에 바지에 잘 어울리는 옥스퍼드화를 신고 다니면 나도 ‘댄디’ 할텐데. 자라기에도 벅차고, 아무리 자라더라도 중학생 남자애처럼 보일 거라는 생각이 나를 누른다.
나이가 들면 아무래도 어른이 될 줄로만 알았지 점점 겁쟁이가 될 줄은 몰랐다. 사실 나는 나에게 뭐든 해주고 싶은 사람이다. 정말 ‘잘 살’ 자신 있는데, 자꾸 ‘아가씨’란 딱지가 나를 압류한다. ‘내 잘빠진 옥스퍼드화 구두’ 는 자꾸 장롱 안으로 숨고 ‘남자친구 있는 아이’의 권력은 달콤하다. 이런. 커밍아웃 애프터서비스는 엄마에게보다 나에게 더 절실한가 보다.
글.진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