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주일 전 편집장에게서 전화가 왔다.
“팸에 관한 글 좀 부탁할게요.”
“저... 팸 아닌데요.”
“...”
농담으로 던진 말이었지만 팸으로 봐주지 말길 바라는 마음으로 한 말이었다.
팸. 우리들끼리 너 팸이야? 아니야? 재 팸이야? 하며 대화 속에서 어떤 사람이 팸이며 어떤 스타일로 사는 것이지 팸인지에 대해서 대충은 짐작했지만 글로 팸에 대해서 쓴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팸에 대한 정의를 확실하게 하기 위해 관련된 사이트를 뒤져보다가 한국성적소수자문화인권센터 홈페이지에 있는 사전 게시판을 클릭했다.
팸이란 모든 레즈비언에게 적용된다고 할 수 없지만 레즈비언 커플 중 여성스러운 레즈비언으로 부치의 반대말이라 한다. 일반적으로 떠올리는 것은 화장하고 머리를 길며 성관계시 주로 삽입을 받는 역할이라고 덧붙인다.
5년 전 한 여자를 알고 그 여자를 만나게 되면서 레즈비언이라는 단어 말고도 정체성을 가진 수많은 단어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저 나에게는 말 뿐이었지, 나에게 전적으로 체감되어 사용되진 않았다. 그러나 사람들은 나의 정체성에 대해 단정 지었다. 샤방샤방한 20대도 아니었건만, 2번이나 삭발을 하면서 모자를 눌러쓰고 다녀도 사람들은 나에게 ‘팸’이라고 단정 지어 말했다. 어쩜 부치인 애인 영향이 컸었는지도 모른다. 나의 애인과 함께 나를 만나지 않는 사람들은 종종 나를 소프트 부치라고 부르기도 했다. 솔직히 나는 ‘소프트 부치’가 마음에 든다. 왜? 소프트 부치가 더 좋은가. 하고 곰곰이 생각해 보니, 여성스럽다는 말 자체가 싫은 것이다. 30년을 살아오면서 ‘여자가 이래야 하고, 저래야 한다’는 말을 수없이 들어 왔는데 레즈비언으로 살면서까지 더 여성스럽게 살아야 한다는 것이 싫은 것이다.
몇 일 전, 애인이 가꾸고 있는 40평 남짓한 텃밭에 둘이 앉았다. 토란대를 꺾고 토란을 캐서 한 쪽에 쟁여 두고, 겨울에 나물로 먹기 위해 고구마순을 따서 껍질을 베끼기 시작했다.
“홀릭이 나한테 팸에 대해서 글을 써 보라고 했는데... 영... 쓰이지가 않네. 있잖아. 홀릭이 나보고 팸에 대한 글을 쓰라고 부탁할 때 내가 ‘저 팸 아닌데요.’라고 이야기 했어. 그러고 다시 쓴다고 했지만 말야.”
“네가 팸이 아닌데, 왜 글을 써?”
“그러네...”
“나는... 네가 처음 만날 때부터 팸인줄 알았고 팸이라서 좋았어. 그런데 네가 팸이 아니라니...”
“그래서 내가 싫어?”
“아니.”
“언제는 팸과 부치 역할 구분 짓는 것이 뭔 상관있냐고 해 놓고서 팸이 아니라고 하니깐 실망스러운가봐.”
“그렇지. 구분 짓는 것은 의미가 없지...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 의미가 없다고 해 놓고도 부치가 부치를 만나는 것에 대해서 생각하지 못 했던 것 같아. 만날 생각을 아예 하지 안 했을 테니깐.”
“난, 그래도 소프트 부치라고!”
“... 끙!!”
종종 팸과 부치의 구분이 의미가 없다고 대화를 나누었으면서 어떤 역할을 수행할 때면 은근히 ‘부치니까...’, ‘팸이니까...’ 라며 기대하기도 했건만, 결국 나의 애인은 은근히 팸이라고 여기고 있었나 보다. 5년 동안 연애를 하면서 거의 애인의 집에 살다시피 하는 나는 빨래, 청소, 설거지는 나의 것이라 생각하고 열심히 한다. 반면 NGO단체 활동을 그만 두고 농사를 지으며 먹거리를 책임지고 있는 애인은 농사일과 음식하는 것이 자신의 몫이라 생각하고 있다. 우리 커플은 성별 역할이 아닌 취향대로 역할을 나누어 살고 있는 것이다. 내가 잘 할 수는 것은 책임지고 하고, 못하는 것은 도움을 요청하거나 상대방이 더 잘 하니 하기를 바라는 것이다.
몇 년 전, 레즈비언 카페의 오프라인 모임에 나갔다가 애인과 나를 보고서 “애인(부치)이 있는데(놔두고서) 굳이 삭발한 이유가 뭐냐(심기 불편하게)고.” 따진 부치 언니가 있었다. 황당한 질문이었지만, 나이 많은 부치에게 이런 팸은 그리 좋아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40-50대 카페 모임에서 MT를 주최해 애인과 함께 참여한 적이 있었다. 애인과 12살을 차이나는 나에게 후배들은 ‘형수님’이라고, 선배들은 ‘제수씨’라고 하는데... 영... 영... 마음이 편안하지 못했다.
많은 사람들이 팸이라고 여기는 나는, 정작 팸이라 생각하지 않고 레즈비언 울타리에 있으면서 팸과 부치의 경계에 대해서 모호함을 느낀다. 분명 몇 년 전부터 일어나고 있었겠지만, 우리는 레즈비언 사이에서 역할의 변화와 인식의 변화가 생겼다고 말하고 싶다.
다시 원점으로 돌아와 팸에 대해 생각해 보니 스스로를 팸이 아닌 소프트부치라고 여기는 이 정체성에 대해서 의문을 가지게 된다. 팸과 부치에 대한 구분을 싫어하면서 나를 소프트부치라 인식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팸에 대해 편견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럴수가 갑자기 옆집 할머니가 떠오른다. 이사를 하고서 처음에는 옆집 할머니와 인사를 주고 받았었다. 그런데 할머니는 유독 애인을 싫어하고 나를 이뻐라 했다. 인사도 애인 인사는 받아주지 않았다. 씩씩거리는 애인에게 한 마디 던졌다.
“할머니는 분명, 부치일 거야.”
글. 그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