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ason 2

[달빛아래서 읽은 L 소설] 코파카바나에 뜨는 달

AhnZ 2010. 8. 20. 22:23





'코파카바나에 뜨는 달'

지은이 : 이상희




1.


벽걸이 티비 위에 걸려있는 시계는 오전 10시를 가리키고 있었지만 검정 색 커튼이 창문을 가리고 있어 실내는 한 밤처럼 어두웠다.

침대 옆 작은 스탠드 불 빛마저 없었다면 한 치 앞도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실내에는 유키 구라모토의 피아노 연주 곡 ‘루이스 호수(Lake Louise)’의 선율이 생크림처럼 감미롭게 울려 퍼지고 있었고,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침대에 누워있는 내 몸 위에선 직장 후배인 정수가 삼십 뿐째 나를 연주하고 있었다.

좋아?” 긴 침묵 끝에 그가 말했다.

서둘러. 이러다 늦겠어.” 나는 담담하게 말했다. 아니, 어쩌면 담담할 수 밖에 없었는지 모른다. 왜냐면, 내 머리 속에는 온통 은미 생각만 가득했기 때문이다.

유키 구라모토의 피아노 연주는 항상 은미를 생각나게 한다.

시간이 흐를수록 정수의 숨소리는 방 안에 가득 찬 피아노 소리를 넘어 점점 더 거칠어졌고, 내 몸을 탐하는 그의 손놀림과 허리 움직임도 클라이맥스를 향해 점점 더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잠시 후 화산처럼 폭발한 그는 마치, 한 여름 엿가락처럼 침대 위에 맥없이 늘어져 가뿐 숨을 몰아 쉬었다. 침대에서 내려온 나는 담배와 마시던 커피 잔을 들고 창가 쪽으로 걸어갔다.

10층 오피스텔에서 내려다 보는 서울시내 모습은 늘 복잡 다양 번잡했다.

나도 모르게 ‘웬 놈의 차와 사람은 저리도 많지!’라는 볼멘소리가 흘러 나왔다.


~’

지난 며칠간 쌓여있던 피곤함을 담배 연기와 함께 내뱉었다.

열려 있던 창문 밖으로 흘러나간 담배 연기는 마치, 줄 끊어진 가오리 연처럼 허공에서 이리저리 어지럽게 흩어져 버렸고, 창문 사이로 스며든 바람은 내 얼굴을 스치고 지나갔다.

차다!

5월 초에 부는 바람이 아직도 쌀쌀한 걸 보니 지구가 많이 아픈가 보다.

아니, 매년 이상기온 발생횟수가 잦아지는 건 분명 지구가 아프기 때문일 것이다.

더 이상 봄, 여름, 가을, 겨울, 사계절의 아름다운 맛을 볼 수 없는 것일까?’ 라는 상상을 하자 왠지 입 맛이 씁쓸해지며 서글픈 생각마저 들었다.

씁쓸해진 입 안에 들고 있던 블랙커피 한 모금을 습관적으로 밀어 넣었다.

쌀쌀한 날씨 탓인지 아니면, 섹스시간이 길었는지 커피는 이미 식어 있었다.

문득, 창가 옆 장식장 위에 놓여있던 사각액자 속 사진이 눈에 들어왔다.

그 안에는 은미와 내가 교복을 입은 체 피아노 앞에서 웃고 있었다. 하얀 피부와 더불어 웃는 모습이 예뻤던 은미는 여배우 손예진을 닮았다.

담배 연기를 한 모금 더 들이마신 나는 꽁초를 일회용 커피 컵 안에 떨어뜨렸다.

그 때였다. 등 뒤에서 정수의 목소리가 날아와 귓가에 스며들었다.

선배 뒤 태 정말 예술이다! S라인을 보면 누가 선배를 서른 살로 보겠어? 게다가 얼굴은 가수 겸 탤런트 이진처럼 예쁘지! 나는 가끔 선배가 왜 여태 혼자 사는지 이해가 안되!”

정수 너 갈수록 말이 짧아진다! 선배가 아니라 선배님! 님 자 꼭 붙여라.”

나는 샤워하기 위해 욕실 쪽으로 걸어가며 말했다.

아니, 사랑하는 사람끼리 말 좀 짧게 하면 안되? 겨우 세 살 차이 가지고……” 그의 목소리가 이내 뽀로통해졌다.

누가 사랑하는 사이야?” 나는 이미 들어선 욕실 밖으로 얼굴을 내밀며 말했다.

선배 아니, 선배님하고 나지 누구겠어?” 그가 침대에 엎드린 체 말했다.

착각은 자유지만 너무 자주하면 몸에 해롭다.” 나는 욕실 문을 닫으며 말했다.


사면이 유리로 된 샤워부스 속 스위치를 돌리자 이내 따듯한 물줄기가 한 여름 소나기처럼 힘차게 쏟아졌다.

이상기온으로 인한 쌀쌀한 날씨 때문에 따듯한 물줄기가 반가웠고, 욕실 안에는 금새 수증기 구름이 뭉실뭉실 떠올랐다.

물줄기에 몸을 맡긴 체 생각했다 ‘남자와 섹스를 하다니!’

순간, 얼굴에 섞은 미소가 피어났다.

이게 다 은미 기지배 때문이야!’

나는 말도 안 되는 이유를 핑계 삼아 쏟아지는 물줄기 속에서 추억 속 은미를 끄집어 냈다.

그 때 그 일만 없었다면……’

그리움이 너무 오래 지속되면 이따금 그리움은 미움이 되곤 했다.

마치, 은미를 향한 내 마음처럼……


2.


나 먼저 올라갈 테니까 넌 한 5분 있다가 와.”

회사 지하 주차장에 차를 대고 정수와 함께 엘리베이터 쪽으로 걸어가며 말했다.

선배 왜요?”

?” 나는 걸음을 멈추고 차가운 눈 빛을 보내며 말했다.

쏘리! 선배님” 그는 머리를 긁으며 멋쩍은 미소와 함께 말했다.

나는 아무 말 없이 다시 걷기 시작했다.

엘리베이터 앞에 도착하자 남녀 네 댓 명이 서 있었다.

주위를 의식해서인지 정수가 내 뒤에서 귓가에 대고 속삭이기 시작했다.

선배님, 회사에 같이 들어가면 누가 뭐랍니까?”

나는 아무 말 없이 엘리베이터 출입문만 바라 보았다.

잠시 후 ‘땡’ 소리와 함께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빈 엘리베이터였기에 바로 올라탈 수 있었다.

같이 가고 싶다는 듯 날 쳐다보는 정수의 눈 빛이 순간 애처로워 보였다.

서서히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자 그는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담배를 꺼내 물었다.


편집부’ 명패가 걸린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빈 책상만 보였다.

누가 가져다 났는지 ‘코리아 레이디 5월호’가 내 책상 위에서 생긋 웃고 있었다.

잡지를 들어 앞뒤를 살펴 보았다.

전체적인 디자인과 색감 그리고 표지모델사진 등이 생각보다 잘 나왔다.

내 너 때문에 지난 달에 고생한 거 생각하면……”

매달 마감이 다가오면 월간지 기자들 고생하는 건 기본이지만 지난 달에는 컴퓨터에 저장해 놓은 인터뷰 기사가 바이러스로 인해 삭제되는 바람에 평소보다 배는 더 힘들었었다.

안녕 하세요, 선배님!”

고개 돌려보니 대학생 인턴기자 혜현이가 환한 미소와 함께 서 있었다.

, 혜현아! 다들 어디 갔니?”

다음달 특집 준비 때문에 회의실에 계세요.”

마감한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특집이야?” 나는 들고 있던 잡지를 책상에 내려 놓으며 말을 이었다. “그런데 넌 왜 여기 있어?”

선배님들이 커피 마시고 싶다고 하셔서요……”

, 커피? 그럴 필요 없어! 너도 나랑 같이 회의하러 가자!”

나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녀의 손을 잡고 회의실로 향했다.


회의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긴 원탁 테이블에 편집장을 중심으로 편집부 기자 5명이 각자 편한 자세로 앉아있었다. 마감을 끝낸 다음 날이라 그런지 다들 얼굴에 피곤이 주렁주렁 열려 있었다. 마감 다음 날은 오후 출근을 할게 아니라 차라리 하루 푹 쉬는 게 더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유미씨 왔어?” 신문을 넘기던 편집장이 뿔 테 안경을 고쳐 쓰며 말했다.

마감 몇 번만 더 하면 얼마 남지 않은 그의 머리카락도 다 빠질 것처럼 사십 대 후반인 편집장의 탈모속도는 브레이크가 듣지 않았다.

선배님 오셨어요?” 이번에는 편집장 주위에 앉아있던 여기자 네 명과 정수처럼 사진을 담당하는 남자기자 박철우가 내게 인사를 건넸다.

나는 인사대신 다들 기피하는 편집장 바로 옆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사지 멀쩡한 사람들이 왜 인턴기자한테 커피 심부름 시키고 난리야?”

그러자 자신들이 잘못한 걸 아는지 먼 산을 쳐다보거나 갑자기 책상 앞에 놓인 폴더를 뒤척이는 등 다들 딴짓을 하기 시작했다.

마지막 경고야, 절대 인턴기자한테 커피 심부름 같은 잡일 시키지 마! 커피 심부름이나 하려고 비싼 대학등록금 내고 머리 터지게 공부한 거 아니니까!”

실내 분위기가 싸해지려는 순간 정수가 분위기 파악 못하고 씩 웃으며 회의실에 들어왔고, 곧이어 우리는 다음달 특집기사 건에 대한 회의를 시작했다.


회의를 시작한지 십 여분의 시간이 흘렀지만 아무도 그럴듯한 아이디어를 내놓지 못하자 편집장의 독촉이 잦아졌다.

자자, 모두들 자유롭게 아이디어 한 번 내보라고!”

그 때였다. 아까부터 주위를 두리번 거리며 선배들 눈치를 살피던 인턴기자 혜현이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조심스럽게 편집장을 불렀다.

저어, 편집장님! 이건 어떨까요?”

어떤 거?” 편집장은 코 끝에 걸린 뿔 테 안경을 올려 쓰며 말했다.

혜현이가 건의한 아이디어는 우리사회 성적소수 자의 현실을 특집기사로 다루어 보자는 것이었다. 최근 김수현이라는 한국 내 최고 드라마 작가에 의해 그 동안 TV에서는 금기시됐던 동성애가 본격적으로 안방극장에서 다루어 지고 있고, 아울러, 국내 팬들에게도 유명한 미국의 라틴 팝 가수 리키 마틴의 커밍아웃 뉴스 등으로 인해 다시 한번 더 동성애에 대한 대중의 관심과 이목이 집중되는 시기에 성적소수 자에 대한 특집기사는 시기상 매우 적절할 것 같았다.

저는 반대입니다!” 조용히 듣고 있던 사진기자 박철우가 강한 어조로 말했다.

?” 편집장이 물었다.

왜냐고 물으신다면 굳이 드릴 말씀은 없지만 전 개인적으로 동성애자들이 싫고, 징그럽습니다. 그리고 우리 잡지의 소중한 지면이 동성애자들을 위해 할당된다는 자체가 그냥 싫습니다!”

그건 적절한 이유가 되지 못해!” 편집장이 말했다.

편집장님, 저도 반대에요!” 이번에는 여성부 배경애 기자였다.

배 기자는 왜?” 편집장이 물었다.

우리 잡지가 먼저 동성애 문제를 다루는 선구자적 역할을 했으면 모를까 김수현 작가가 쓴 드라마 때문에 동성애가 대중의 관심을 받는데 우리마저 특집으로 동성애를 다루면 왠지 저희 잡지가 유행을 쫓아가는 것 같고 그러다 보면 저희 잡지 명성이 실추될 것 같아서요.”

배 기자의 이유는 박철우 기자의 무조건적인 반대보다는 나름 설득력이 있었다.


회의 노트에 ‘특집기사’, ‘동성애’라고 써놓고 그 위에 동그라미를 그리고 있을 무렵 편집장의 허스키한 목소리가 귓가에 스며들었다.

우리 잡지사 브레인인 나유미씨 생각은 어때?”

글쎄요……”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건물 밖이 내다 보이는 창가로 걸어갔다.

창 너머 또 다른 서울 거리에도 여전히 사람과 차가 많았다.

나는 창가 턱에 걸 터 앉아 편집장을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판매부수 때문에 사람들의 말초신경만 자극하는 형식적인 특집기사라면 저도 반대에요. 하지만, 독자에게 제대로 된 정보와 진실을 전해주기 위한 거라면 찬성이에요.”

제대로 된 정보와 진실이라면?” 편집장이 물었다.

나는 창가에서 일어나 편집장 옆 자리로 돌아와 의자에 앉으며 말문을 열었다.

많은 사람들이 덴마크 작가 안데르센의 인어공주 이야기는 알아도 그 이야기를 쓴 안데르센이 동성애자였고, 그가 동성애자였기 때문에 이루지 못한 자신의 사랑 이야기를 모티브로 한 인어공주 같은 가슴 아픈 러브 스토리를 쓸 수 있었다는 건 모른다는 거죠!”

어머 어머, 안데르센이 동성애자였어요?” 맞은 편에 앉아있던 박선희 기자가 소프라노 톤의 목소리로 말했다.

아니, 선배는 그것도 몰랐어요?” 정수가 오랜 침묵 끝에 입을 열었다.

, 나는 몰랐어! 그럼, 안데르센이 남자를 사랑한 거야? 어쩜 좋으니?”

박선희 기자는 손바닥을 마주치며 말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정수가 말했다.

어디 그 뿐 인줄 아세요? 우리나라 역사에도 동성애에 대한 기록이 있는데요,

고려시대 목종과 공민왕도 동성애를 했다는 기록이 있고, 조선시대에는 문종의 부인이었던 봉씨가 궁녀와 동성애 관계였다는 기록이 있어요. 그로 인해 봉씨는 궁에서 폐출되었죠.”

자자, 조용히 하고!” 편집장이 가볍게 테이블을 치며 말했다.

그는 곧이어 안경을 벗어 테이블 위에 내려 놓으며 말을 이었다.

다른 아이디어가 없으면 다음달 특집은 우리 사회 동성애 문제를 다루는 걸로 하고, 나유미씨는 내일 오전에 피아니스트 김현철씨 인터뷰하는 거, 알지? 내가 아주 어렵게 부탁해서 성사된 일이니까 신경 써서 잘해야 돼?”

나는 편집장에게 대답대신 손 가락으로 원을 그려 오케이 사인을 보냈다.

그러자 편집장은 가볍게 미소 짓고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그럼, 다들 동성애에 대한 취재계획서 준비해서 내일 오후 1시에 다시 모입시다.”


3.


퇴근 후, 옛 친구를 만나 오랜 시간 숙성된 와인을 맛보는 것은 내 삶의 커다란 즐거움이었다. 특히, 비 오는 날 추억이 깃든 잔잔한 옛 음악을 벗삼아 창문을 두드리는 비 소리와 함께 음미하는 와인은 이 세상 그 어떤 형용사로도 표현하기 힘든, 한 마디로 끝내주는 맛이었다!

이따금 들리는 와인 바 Black Sky는 커다란 유리창이 마음에 드는 곳이다.

스카이 라운지였던 곳을 개조해 와인 바로 만든 곳이라 사면이 유리로 되어있어 일몰 후 떠오르는 서울 야경은 형형색색 가을 단풍처럼 우리에게 늘 색다른 볼거리를 제공해 주었다.

바 중앙에 위치한 피아노 앞에는 검정 드레스를 입은 이름 모를 한 여인이 앉아 George Winston의 피아노 연주 곡 ‘Thanksgiving’을 연주하고 있었다.

잔잔한 피아노 선율을 느끼며 와인 잔을 만지 작 거린지 십 여분쯤 지났을까?

고등학교 동창 희진이가 내 오른쪽 옆 자리에 와 앉으며 말했다.

오래 안 기다렸지?”

손목시계를 보자 그녀는 약속시간보다 5분 일찍 왔다.

너 죽고 싶구나?”

아니!” 희진이의 눈이 순간 동그랗게 커졌다.

그럼 계속 늦게 다녀. 사람이 갑자기 안 하던 짓 하면 죽을 때가 된 거래!”

기지배, 난 또 무슨 소린가 했네!”

희진이는 핸드백에서 담배를 꺼내 물더니 내 쪽으로 담배 갑을 내밀며 말했다.

피울래?”

아니, 방금 전에 폈어.” 나는 담배꽁초 혼자 쓸쓸히 누워있는 재떨이를 가리키며 말했다.

가끔 만나는 희진이는 시간이 흘러도 늘 한결 같은 친구였다.

웬만한 남자보다 더 입이 무거운 그녀는 나에게 비밀창고 같은 존재였고, 그 어떤 비밀도 그녀에게 보관하면 절대 누설되지 않았다.


대학에서 산업디자인을 전공한 그녀는 졸업 후 디자인 회사에 취직, 같은 회사 직원과 사내커플로 맺어진 결혼 4년 차 주부이기도 했다. 하지만, 죽도록 사랑했던 남편이 최근 다른 여자와 사귀는 걸 알게 된 그녀는 그 충격으로 인해 정신과 치료를 받기도 했다. 담배도 그래서 피우기 시작했다.

전보다 많이 나아졌다고는 하지만 그녀의 얼굴은 아직도 많이 야위어 있었다.

얼굴 많이 좋아졌네!” 나는 접대용 대사를 말했다.

그래? 그럼 뭐해? 상처받은 마음에는 약도 없다는데……”

희진이는 마치, 그녀의 걱정과 시름을 털어내듯 담배 연기를 허공에 내뱉었다.

잠시 후 희진이는 오늘 날짜로 가정법원에 이혼서류를 접수했다고 말했다.

후회하지 않겠어?” 나는 살포시 그녀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그녀는 대답대신 힘든 미소를 짓더니 와인 한 모금을 입 안에 털어 넣고 입을 열었다.

유미 네 말이 맞았어!”

무슨 말?”

네가 그랬잖아, ‘사랑은 누구랑 하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사랑은 어떻게 해야 하느냐, 그러니까 상대보다 내용이 더 중요하다’는 말, 기억 안나니?”

기억나!”

사랑에서 믿음이 무너지면 그건 식물인간과 다를 게 없다고 봐. 주위 시선 때문에 억지로 결혼생활 지속하고 싶지 않아!” 희진이의 생각은 확고했다.

그녀는 또 다시 담배를 꺼내며 입을 열었다.

은미 소식은?”

나는 대답대신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그 때 그 일만 없었으면 네가 자퇴하지 않아도 됐는데……”

시간이 흘러 상처가 아물 만도 한데 은미는 늘 내 마음을 아프게 했다.

한 달여 만에 다시 만난 우리는 와인 두 병에 현실의 어려움과 불만을 담아 희망이란 안주와 함께 섞어 마시고 기약 없는 다음을 약속하며 헤어졌다.

집으로 향하는 택시 안에서 바라 본 강변도로 인근 밤 하늘은 말 그대로 Black Sky였다. 문득, 산다는 것이 결코, 쉽지 않은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왜 일까? 자문해 보았다.

인생이란 원래 정답도 해답도 없는 건데 다들 정답을 아니, 정답만 쓰려고 하니 힘든 게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쓴 답은 늘 틀린 것 같고, 남이 쓴 답이 맞는 거 같아 그렇게 살아보면 주위에 있는 또 다른 사람이 정답인 것 같고……


4.


유럽에서 주로 활동하는 세계적인 피아니스트 김현철을 인터뷰하기 위해 나는 정수와 함께 아침부터 방배동의 한 고급 주택가를 헤매고 있었다.

갑자기 고장 난 네비게이션 때문에 나는 천천히 운전할 수 밖에 없었다.

조수석에 앉아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정수가 입을 열었다.

! 이게 집이야, 궁궐이야? 뭔 놈의 집과 집 사이가 이렇게 멀대요?”

부잣집 처음 봐? 아마추어처럼 왜 그래? 주소나 잘 살펴!”

나는 운전석 창문을 활짝 열어놓은 체 집집마다 주소를 확인하고 있었다.

라디오에서 아침 9시를 알리는 시보가 울리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 정수가 말했다.

선배님, 저기요!”

정수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곳으로 시선을 옮기자 검정 색 대문 위에 김현철의 집 주소인 695-83호 라고 쓰여진 하얀색 플라스틱 주소 창이 보였다. 하지만, 보안 때문인지 김현철의 문패는 보이지 않았다.


김현철 집 안으로 들어서자 가사 도우미로 보이는 50대 중반의 인상 좋은 아주머니가 우리를 응접실로 안내했다. 넓은 어깨만큼 엉덩이도 크신 분이었다.

여기 앉아 계시면 선생님 곧 나오실거에유.”

, 감사합니다.” 나는 소파에 앉으며 가벼운 목례와 함께 말했다. 그리고 잠시 2층으로 된 집 안을 둘러보았다.

국내에서는 보기 힘든 이태리풍의 소파와 고급스런 장식품들이 전시되어 있는 실내는 웬만한 사람들이 방문하기에는 위화감을 느낄 만큼 너무 고급스러웠다.

응접실 인근에 있는 피아노는 상표를 보자 국내에 단 3대 밖에 없다는 유럽에서 제작된 최고급 수제품이었다.

옆자리에 앉은 정수는 인터뷰 사진을 찍기 위해 사진기를 점검하고 있었다.

그때였다.

베토벤처럼 굵은 파마머리를 뒤로 넘긴 헤어스타일에 금테안경을 쓴 중년남자가 우리 쪽으로 걸어오며 말했다.

안녕 하세요? 김현철입니다.”

안녕 하세요? 저는 어제 전화로 인사 드렸던 나유미 기자라고 합니다. 이쪽은 저와 함께 일하는 사진기자 김정수씨고요.”

처음 만난 우리 셋은 서로 명함을 교환하고 자리에 앉아 바로 인터뷰를 시작했다.

인터뷰는 주로 잡지사가 사전에 준비한 여러 가지 질문 중에서 인터뷰 대상자가 선호하는 것으로 선별하여 이루어진다.

그러다 보니 가끔은 직접 만나는 게 무의미하지만 이번처럼 사진을 찍어야 하는 경우는 어쩔 수 없이 인터뷰 상대를 만나야만 했다.

김현철은 내가 사전에 이메일로 보내준 질문 중에서 자신이 선별한 것에 대해서만 답변했고, 나는 녹음기를 틀어놓은 체 중요한 내용은 틈틈이 노트북 컴퓨터로 메모하며 그의 이야기를 경청하고 있었다.

삼십뿐 쯤 지났을까? 예정된 인터뷰가 모두 끝나자 정수는 집에서 지내는 김현철의 자연스런 모습을 담기 위해 셔터를 누르기 시작했다. 한참을 셔터만 누르던 정수가 갑자기 사진기를 내려 놓으며 말했다.

사모님은 어디 가셨나요? 두 분이 함께 찍으면 좋을 것 같은데요!”

그러자 김현철이 안경을 벗으며 말했다.

죄송하지만, 제 와이프 만큼은 언론에 노출시키고 싶지 않습니다!”

그의 말투에는 확고한 의지가 담겨있어 우리는 재차 부탁할 수 없었다.


사진촬영까지 한 시간 가량의 인터뷰를 모두 끝낸 우리는 가사 도우미 아주머니의 배웅을 받으며 집을 나섰다. 김현철의 아내는 끝내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문득, 괘씸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저마다 생김새가 틀린 것처럼 저마다 사는 모습과 생각하는 것도 다른 법이니 이해하자고 이내 마음을 고쳐먹었다.

선배 아니, 선배님! 곧장 회사로 갈 거죠?” 정수가 자동차 트렁크에 사진 장비를 실으며 말했다.

, 그래야지.”

나는 차 문을 열며 무심코 김현철의 집을 바라 보다2층 베란다 창가에서 한 여자가 우리를 지켜보는 걸 발견했다. 그리 멀지 않은 거리였기에 선명하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전혀 얼굴을 못 알아볼 정도는 아니었다.

순간, 알 수 없는 짜릿한 느낌이 내 몸을 강하게 사로잡았고, 나는 빠르게 그 쪽을 향해 걸어갔다. 그러자 그 여자도 순간 움찔하더니 이내 창가 안쪽으로 사라졌다.

선배님, 왜 그래요?” 정수가 놀란 목소리로 내 어깨를 잡으며 말했다.

나는 온 몸에 힘이 빠지며 자리에 털썩 주저 앉으며 말했다.

은미야! 은미였다고……”


5.


, 주목!”

노처녀 음악 선생님은 지휘봉으로 음악실 교탁 위를 내려치며 말했다.

이번 시간에는 너희 반 반장인 은미가 지난 번 전국음악대회에서 우승할 때 연주했던 유키 구라모토의 ‘루이스 호수’라는 곡을 연주할거니까 떠들지 말고 감상하도록 한다. , 은미 앞으로!”

선생님의 호명이 있자 음악실 맨 앞줄, 내 옆에 앉아 있던 은미는 자리에서 일어나 피아노 앞으로 걸어가 앉았다. 피아노 앞에 앉은 은미의 모습은 참 아름다웠다.

하얀 피부가 눈 부신 길고 얇은 목선 그리고 창가로 스며든 아카시아 향이 베어있는 바람에 날리는 그녀의 긴 생머리!

고등학교 1학년 때 처음 만난 은미와 나는 금새 단짝이 되었고, 학교 육성회장인 은미 어머니의 도움으로 고3이 된 올해까지 우리는 늘 같은 반일 수 있었다.

피아노 앞에 앉은 은미는 잠시 숨을 고르더니 이내 연주를 시작했고, 나는 늘 그렇듯 눈을 감고 그녀의 연주를 마음으로 감상하기 시작했다.

5, 푸른 잔디가 끝없이 펼쳐진 넓은 들판 옆에 커다란 호수가 있고, 그 호수 안을 가득 메우고 있는 파란 물결 위에는 어느 새 별들이 산책 나와 저마다 크고 작은 불 빛으로 재잘거리는 초여름 대자연의 아름다운 모습이 마음 속에 그려졌다.


얼굴도 예쁘고, 피아노도 잘 치는 은미는 남녀 통틀어 학교에서 가장 인기가 많았다. 나는 그런 은미와 제일 친하다는 게 항상 자랑스러웠다!

우리는 친한 친구들이 그러하듯 항상 붙어 다녔고, 그것도 모자라 때로는 은미네 집에서 함께 자기도 했다.

함께 자는 날이면 우리는 침대에 누워 음악을 들으며 밤새 수다를 떨곤 했다.

처음 유키 구라모토의 음반을 접하던 날도 그랬다.

세상은 잠들고 달빛이 유난히 아름다워 스탠드 불빛마저 잠재웠던 그날 밤,

유키 구라모토? 그게 누군데?” 나는 은미 침대에 엎드려 말했다.

일본에서 유명한 피아노 연주가래!” 은미는 CD 케이스를 열며 말했다.

유키 구라모토의 음반이 한국에선 아직 판매되지 않았지만 일본에 유학간 은미 오빠가 보내준 CD를 통해 우리는 그의 연주를 들을 수 있게 되었다.

오빠가 Lake Louise 부터 들어보래!” 은미는 책상 위에 있는 CD 플레이어의 재생버튼을 누르고 내 옆에 와 누웠다.

이윽고 방 안에는 맑고 부드러우며 잔잔한 피아노 선율이 피어 오르더니 순식간에 내 마음 속에 평온함과 함께 스며들었다. 그의 연주는 마치, 대자연이란 도화지 위에 순수함과 낭만이란 물감으로 그려놓은 한 폭의 수채화 같았다.

연주가 끝나자 은미가 일어나 침대에 앉으며 말했다,

음악은 좋은데 제목은 별로다!”

제목? ’루이스 호수’가 어때서?” 나 역시 은미처럼 침대에 앉으며 말했다.

호수는 싫어. 호수는 물이 답답하게 갇혀 있는 거잖아? 나는 바다가 좋아!

넓디 넓은 바다, 갇혀있지 않고 어디든지 자유롭게 흘러갈 수 있는 바다가 좋아!”

달빛 아래에서 운치 있게 말하는 은미의 모습이 그날따라 이상하리만큼 아름답게 보였다. 그러자 내 심장은 서서히 빨리 뛰기 시작했다.

은미를 친구로 좋아했던 내 감정은 어느 날 갑자기 그렇게 사랑으로 만개해 버렸다. 사랑이 찾아 오는 시간은 오래 걸릴 수 있지만 막상 찾아온 사랑에 빠지는 것은 한 순간이었다. 누군가 왜 그랬냐고 묻는다면 나는 특별히 할 말이 없다. 사랑은 ‘왜’라는 액세서리를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말이다!


그 날 이후 은미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나를 대했지만 그런 은미를 대하는 나는 어딘가 불편하고 어색했다. 가장 어색했던 건 그런 내 자신을 받아들이고 인정해야 하는 것이었다. 좋아하던 친구에게 어느 날 사랑이란 감정을 느꼈을 때의 황당함, 그건 내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었지만 그 역시도 내 감정이었고, 나만이 넘어야 하는 내 삶의 일부였던 것이다. 하지만, 쉽지 않았다. 그런 내 자신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도, 전처럼 은미를 대해야 하는 것도……

어느 날 갑자기 모든 게 얽혀버린 실타래처럼 복잡해졌다.

얽힌 실타래는 쉽게 풀리지 않았지만 시간은 늘 그렇듯 묵묵히 자신의 길을 걸어갔다. 학교 뒷산을 넘어간 5월의 아카시아 향기는 어느 새 찬바람이 되어 가을 단풍과 함께 우리 곁으로 다시 찾아왔다.

다들 수능준비에 여념이 없었지만 나는 은미를 향한 감정 때문에 하루하루를 힘들게 보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모의고사를 본 우리는 그날 저녁 비디오 방에서 영화를 보며 머리를 식히기로 했다. 약속시간에 맞춰 은미가 알려준 곳으로 가자 그녀는 나보다 더 일찍 와 있었다.

오래 기다렸니?” 나는 비디오 방 문을 닫으며 말했다.

아니! , 영화는 내가 골랐다.”

그래? 뭐 골랐는데?”

보면 알 거야!” 은미는 들고 있던 리모컨의 재생버튼을 누르며 말했다.

나는 속으로 ‘무슨 영화일까?’ 궁금해 하며 그녀 옆에 앉았다.

이윽고 TV 화면 속에는 왕가위 감독이 만든 ‘해피 투게더(Happy Together)’라는 영화가 시작되었다. 언론을 통해 깐느 영화제에서 감독상을 받은 작품이라는 것과 동성애를 소재로 한 영화라는 정도는 알고 있었다. 문득, ‘은미가 하고 많은 영화 중에서 하필이면 왜 이 영화를 골랐을까?’ 궁금했다. ‘혹시, 은미가 자신을 향한 내 감정을 알아챈 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하자 순간 두려웠다! 그로 인해 소중한 은미를 영영 잃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자 나도 모르게 등에서 식은 땀이 한 줄기 흘러내렸다. 은미를 신경 쓰느라 백 프로 영화에 집중할 순 없었지만 동성애라는 쉽지 않은 소재를 무난하고 아름답게 영상에 담아낸 작품이었다.

특히, 마지막에 떠나간 연인의 빈 자리를 발견하고 슬퍼하며 눈물 흘리는 주인공의 모습은 나와 은미도 눈물 흘리게 했다. 그리고 우리는 마치,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서로의 눈물을 닦아주며 말했다.

은미야, 울지마!”

너두 울지마!”

그러다 나는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났는지 그녀의 얼굴로 다가가고 있는 내 자신을 발견했다. 이성은 내게 안 된다고 했지만 감성은 아무 제지도 하지 않았다. 은미의 얼굴이 가까워지자 그녀는 아무 말 없이 두 눈을 감았고, 나 또한 그녀처럼 살며시 두 눈을 감았다. 그리고 얼마 안 있어 내 입술이 그녀 입술에 닿는 느낌이 들었다. 전기에 감전되면 이런 느낌일까? 그녀와의 입맞춤으로 인해 순간 나는 가슴이 터지는 줄 알았다. 요동치는 내 심장은 마치, 지진이 난 것 같았다.

내 심장소리를 들었는지 그래서 그런 나를 진정시켜주려 했는지 은미는 아무 말 없이 나를 포근하게 꼭 안아주었다.

겨울을 재촉하는 심술 가득한 늦가을 바람 소리가 을씨년스럽게 창문을 두드리고 있었지만, 은미의 숨결을 따스하게 느낄 수 있었던 그 밤은 내 생에 가장 행복한 밤이었다!

그 날 이후 우리는 전보다 더 자주 그리고 더 친하게 지냈다.

우리는 자물쇠가 달린 비밀 일기장을 공유하며 서로에게 하고 싶은 말이나 서로에게 느낀 감정 혹은 약속 등을 그곳에 기록하기도 했다.

은미는 그 일기장을 통해 한 가지 계획을 세웠다. 그것은 우리가 내년에 대학생이 되고 성인이 되면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에 위치한 ‘코파카바나(Copacabana)’ 해변으로 함께 배낭여행을 가는 것이었다. 그녀는 그곳에서 유키 구라모토의 ‘루이스 호수’를 넓은 바다로 보내 답답함을 벗어내고 마음껏 자유를 느끼게 해주고 싶다고 했다. 그리고 그날 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해변으로 손 꼽히는 코파카바나 해변 달빛 아래에서 내게 처음 키스해주겠다는 약속도 했다.

은미와의 감정교감이 있은 후 나는 평소보다 더 열심히 학교생활을 수행했다.

창 밖 수은주는 날이 갈수록 떨어졌지만 은미를 향한 내 감정과 행복지수는 날이 갈수록 올라만 갔다. 너무 행복해서 가끔은 이러다 뻥하고 터지는 건 아닐까 두렵기도 했다.


12월 달력이 우리 앞에 처음 선보인 날, 은미와 나는 3교시 음악수업을 받기 위해 교실에서 나와 음악실 쪽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유미야, 유미야!”

누군가 내 이름을 불러 고개 돌려보니 우리 반 친구 수영이었다.

유미야, 담탱이가 너 빨리 상담실로 오래!”

담임 선생님이?”

상담실에 도착해 문을 열고 들어가니 그곳에는 담임 선생님뿐만 아니라 은미 어머니도 계셨다.

두 분에게 예의를 갖추려 고개를 숙였다 드는데 갑자기 은미 어머니가 다가오더니 내 뺨을 있는 힘껏 내려치시는 것 이었다.

아팠다! 그리고 순간, ‘혹시, 일기장?’ 하는 생각이 들자 무서웠다!

은미 어머니가 나를 노려 보다 ‘나쁜 년’이란 소리와 함께 또 다시 손을 들자 담임 선생님은 ‘진정하세요’ 라며 그녀의 손을 잡고 말렸다.

담임 선생님은 들고 있던 노트 한 권을 내 앞에 내밀며 말했다.

이거, 유미 네가 쓴 거 맞니?”

우리의 비밀 일기장이었다! 그런데 자물쇠가 보이지 않았다!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은미와 내가 쓴 우리의 소중한 추억과 감정을 남이 봤다는 생각을 하자 무서웠다.

마치, 벌거벗은 몸으로 만인 앞에 서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러자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은미 어머니는 계속해서 나를 나쁜 년 취급하셨다. 내가 착하디 착한 자기 딸을 꼬드겨 동성연애라는 몹쓸 짓을 했다고 소리쳤다. 그 말을 듣고 나를 쳐다보는 담임 선생님의 눈빛도 예전과는 달리 매우 차가워 보였다.

억울했다. 그리고 서러웠다. 사람이 사람을 좋아해서 그 사람을 아껴주고 사랑한 것이 뺨 맞고 나쁜 년 소리를 들어야만 하는 것일까? 그들이 나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처럼 나 또한 그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그들은 나보다 어른이었고 그래서 그들은 나보다 더 큰 목소리를 낼 수 있는 힘과 지위가 있다는 것이었다.

나는 당장 어머니를 모셔오라는 담임 선생님의 명령에 따라 쉬 그치지 않는 눈물을 부여잡고 집으로 발걸음을 옮겨야 했다. 살을 에이는 듯한 12월 찬 바람이 부는 교정에는 이름 모를 낙엽들만 정처 없이 이리저리 나뒹굴고 있었다. 얼굴에 흐르는 눈물 때문에 날씨는 더 차갑게 느껴졌다.

음악실이 있는 건물 밑을 지나는데 피아노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루이스 호스’였다. 분명, 은미가 연주하는 것이었다.

똑 같은 음악이지만 지난 5월에 듣던 ‘루이스 호수’와 12월에 듣는 ‘루이스 호수’의 느낌은 극과 극이었다. 세상 모든 이의 생각이 마치, 호수 속에 갇혀있는 것처럼 답답하게 느껴졌다. 갈수록 희미해 지던 ‘루이스 호스’의 애절한 절규는 교문을 나서자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그 날 이후 나는 두 번 다시 은미가 연주하는 피아노 소리를 들을 수 없었다.


6.


너무 그리워 때론, 미움의 대상이 되기도 했던 은미를 찾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그녀 앞에 나서지 못했다.

은미를 그리워하던 시절에는 그녀가 어디에 있는지 알아 그녀를 멀리서나마 바라볼 수만 있다면 그것으로 만족하리라 생각했는데 막상 이렇게 그녀를 찾고 보니 또 다시 현실은 생각과는 많이 달랐다.

흘러버린 시간 때문일까? 아니면, 미움으로 변한 내 그리움이 너무 아팠기 때문일까? 은미와 나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그 무엇이 있었다.


편집부 식구들은 특집기사 주제가 정해지자 또 다시 일사 분란하게 마감이란 고지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나는 달리지도 걷지도 못하고 그저 멍하니 엉거주춤하게 앉아있는 꼴이었다.

5월은 어느덧 중순을 향해 흘러가고 있었지만 내 취재노트는 아직도 백지상태였다.

그러던 어느 날 오후, 우리는 편집장의 요구로 모두 다 회의실에 모였다.

, 다들 알아서 잘 하리라 믿지만 그래도 중간점검이 필요할 것 같아서 이렇게 모이라고 했습니다.” 편집장은 몇 가닥 남지 않은 머리를 쓸어 넘기며 말했다.

곧이어 우리는 그 동안 취재한 자료에 대해 발표하고 논의하는 시간을 마련했다.


인턴기자 혜현이는 우리사회 동성애에 대한 가장 기초적인 정보에 대해 조사한 내용을 발표했다. 일반인과 다르기 때문에 동성애자들이 자신들을 가리켜 ‘이반’이라 칭하는 것부터 시작해 대학캠퍼스 내에서 동성애자들을 바라보는 젊은 세대의 조금은 개방된 시각까지 그녀가 준비한 자료는 동성애 기사를 처음 접하는 독자들에게 유익한 정보가 될 것 같았다.

배경애 기자는 홍석천, 하리수, 이시연처럼 커밍아웃을 통해 자신이 동성애자임을 밝히고 세상 편견과 맞서 당당하게 우리사회 일원으로 살아가는 연예인과 반대로, 세상 편견과 차가운 시선을 이겨내지 못하고 자살한 고 장채원, 김지후 같은 연예인의 삶을 비교해서 일반인이 알지 못하는 동성애자들만의 애환과 고통에 대해 조사한 내용을 발표했다.

박선희 기자는 동성애자뿐만 아니라 트랜스젠더 등 이성애 제도에서 소외된 모든 사람을 지칭하는 성적 소수자의 낙후된 인권에 대한 내용을 발표했다.

아울러, 그녀는 최소 40년 이상의 역사를 지니고 있는 서양의 동성애 인권과 우리네 것을 비교하며 이제 겨우 걸음마를 시작한 우리의 동성애 인권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하기도 했다.

애당초 이번 특집에 거부반응을 보였던 사진기자 박철우는 끝내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으려 무려 20일이란 월차를 내고 동성애 취재에서 완전히 발을 뺐다.

하지만, 그는 동성애자를 바라보는 ‘일반인의 생각’ 코너에 ‘더럽고, 불결하다’라는 자신의 의견을 반드시 실어달라고 부탁했다.

취재보고를 겸한 중간발표가 끝나자 편집장은 안경을 벗으며 말했다.

나유미씨, 동성애자를 자식으로 둔 부모 인터뷰는?”

마감이 열흘 앞으로 다가왔지만 쉽사리 인터뷰 상대를 섭외할 수 없었다.

동성애자는 다수의 편견과 차별 앞에 자유롭지 못하고 때론, 자신의 정체성마저 숨기고 살아가는데 하물며 그 부모야 오죽하랴!

편집장에게 걱정하지 말라는 메시지를 남기고 회의실을 빠져 나온 나는 그 길로 서울역으로 가 기차를 타고 시골집으로 향했다.


어머니 혼자 사는 시골집은 김천에서 버스로 약 한 시간 정도 더 들어가야 하는 아주 작은 시골 마을이었다.

지은 지 50년도 더 된 낡은 시골집 대문을 열고 들어서자 장독에서 된장을 뜨던 어머니가 ‘어서 와라! 배 고프지?’ 하시며 나를 반갑게 맞아 주셨다.

마당 한 켠에 묶여있던 진돗개 잡종인 영구도 연신 꼬리를 흔들며 나를 반겼다.

어머니가 잠시 부엌에 들어간 사이 나는 영구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는 대청 마루에 앉아 여독을 털어냈다. 시골 공기는 늘 맑고 깨끗하다. 맑은 공기를 마시고 있자니 문득, 옛 생각이 떠 올랐다.

은미 어머니 때문에 수능을 한 달 앞두고 자퇴한 나는 이곳으로 도망치듯 이사 왔었다. 당시에는 서럽고 억울하고 한 편으론, 무서웠지만 시간이 흐른 지금은 그것마저 옛 추억이 되어 입가에 쓴 웃음으로 피어났다.


저녁을 먹고 산책을 다녀온 우리 모녀는 오랜 만에 손을 잡고 한 이불아래 누웠다.

나는 낮부터 아니, 사실은 아주 오래 전부터 하고 싶었던 말을 어렵게 꺼냈다.

엄마, 미안해!”

뭐가?”
내 친구들은 시집가서 애 낳고 잘사는데 나는 그러지 못해서……”

어머니는 아무 말 없이 내 손을 더 꼭 잡아 주었다.

지난 십 여 년의 시간 동안 우리 모녀는 서로에게 상처가 될까 바 쉽사리 동성애에 대해 말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는 때가 된 것 같았다.

엄마, 내가 은미를 사랑한다는 이야기 처음 들었을 때 어땠어?”

어머니는 숨을 한 번 고르더니 입을 열었다.

지금이야 세월이 흘러 말할 수 있지만 그 때는 어린 네가 행여 몹쓸 짓이라도 할까 바 네 앞에서 울지도 못하고 이 어미 가슴이 찢어졌었지! 왜 하필 내 자식이? 왜 하필 우리 유미가? 하는 생각에 말이야!”

보고된 자료에 의하면 동성애자를 자식으로 둔 부모들은 자기들 체면 때문에 자식들을 강제로 결혼 시키거나 병원에 감금하거나 혹은 해외선교지 등으로 보내는 경우도 있었다.

그런 부모들은 너무 이기적인 거야!” 어머니가 말씀하셨다.

물론, 자식 걱정하는 부모 마음에서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해. 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차가운 시선으로 바라보는데 부모마저 자식을 인정해 주지 않고 자기 가치관에 맞춰 바꾸려고만 하면 결국엔 부모 자식 모두 다 힘들고 불행해 지지 않을까?”

그날 밤 우리 모녀 사이에는 많은 대화가 오고 갔다.

홀로 나를 키우며 세상 편견과 차가운 눈초리를 감수해야 했을 어머니의 삶을 상상하자 나도 모르게 회한의 눈물이 하염없이 흘렀다. 나는 눈물을 감추기 위해 어린 아이처럼 어머니 품속으로 파고 들었다.

어머니는 그런 나를 꼭 안고 내 등을 토닥거리며 말씀을 이어가셨다.

유미야, 누가 뭐래도 네 자신이 먼저 행복해야 해! 네가 행복해야 네 주위 사람도 챙겨줄 수 있는 거야. 엄마는 말이다, 우리 유미가 자식을 안 낳아도 좋으니까 네가 그 누구보다 더 행복하게 잘 살았으면 좋겠어!”


7.


내가 지금껏 성 정체성을 숨기고 살았던 가장 큰 이유는 나로 인해 어머니에게 피해가 갈 것 같았기 때문이다. 물론, 잡지사 기자로 쌓아 올린 사회적 기반도 무시할 수 없었다. 그것을 지키기 위해 정수와 섹스까지 했으니 말이다.

고등학교 때 얽혀 쉽사리 풀리지 않던 내 삶의 실타래가 어머니를 만나고 오자 풀릴 기미가 보였다.

나는 어머니와 나눈 진솔한 대화를 동성애자 부모 인터뷰 기사로 정리하기 시작했다. 며칠 전 어머니와 나누었던 대화를 떠올리자 다시금 눈가에 이슬이 맺히기도 했지만 한 편으론, 답이 없던 어려운 수학문제를 푼 것 같아 답답했던 가슴이 뻥 뚫린 것 같았다. 그리고 어머니에게 한 없이 감사하고 또 감사했다.

인터뷰 기사를 끝내 나는 특집기사 취재 후 적는 ‘기자 수첩’을 쓰기 시작했다.


독자 여러분, 하와이 오아후(Oahu)의 화산지대 ‘카에나 포인트’에는 ‘알바트로스’라는 새들이 짝짓기를 하기 위해 모여드는 곳으로 유명하다고 합니다. 조류학자들에 따르면 이 새들은 평생 단 한 마리의 배우자를 맞는 즉, ‘이혼율’이 가장 낮은 새라고 합니다. 생물학자 린지 영이란 사람은 알바트로스를 일부일처의 상징으로 표현했습니다. 하지만, 이 알바트로스 커플이 반드시 암수 한 마리씩으로 이루어지지 않았을 수도 있다고 뉴욕 타임즈 신문이 최근 보도했다고 합니다.

동물들의 동성애는 아주 예외적인 것이 아니며 홍학, 아메리카 들소, 딱정벌레, 열대어, 흑 멧돼지 등을 비롯한 450여종의 동물들이 동성애를 보이는 것으로 지금껏 학회에 보고돼 있다고 합니다. 동물은 사람과 달리 동성애를 한다고 해서 무리에서 제외하거나 이상한 눈으로 보지 않는다고 합니다!


사람들이 가끔 제게 말합니다. ‘그만 고르고 이제 웬만하면 결혼하지 그래?’ 라고 말입니다. 그럼, 저도 말합니다, ‘결혼이 무슨 노사협상입니까? 웬만하면 하게?’

웬만하면’ 이란 생각은 때론, 세상을 살아가는데 있어 불협화음을 최소화할 수 있는 지혜로운 감초역할을 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사랑에 있어 ‘웬만하면’ 이란 생각은 이혼이나 별거 같은 예정된 아픔과 상처를 불러올 확률이 높습니다.

인간은 본래 나약한 동물이기에 다수라는 군중심리에 쉽게 유혹되거나 휩쓸리게 됩니다. 그리고 다수는 소수를 이상한 눈 빛으로 바라보고, 다수에 끼지 못한 대부분의 소수는 다수를 동경하며 그 무리에 끼려고 노력합니다.

하지만, 전 다른 건 몰라도 사랑과 결혼 앞에서만큼은 분명, 소수이고 싶습니다.

저는 남성, 여성을 떠나 제 마음을 움직이는 사람, 사람을 사랑하고 싶습니다!’


인터뷰 원고와 기자 수첩 내용을 편집장에게 이메일로 보낸 후 나는 책상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아울러, 하루 평균 만 명 이상 방문하는 내 블로그에도 ‘기자 수첩’내용을 포스트 했다. 책상을 정리한 지 얼마 되지 않아 편집장이 상기된 표정으로 내 자리로 다가왔다.

그는 손에 쥐고 있던 A4 용지를 내 책상 위에 세차게 내려 놓으며 말했다.

나유미씨 도대체 이게 무슨 소리야? 당신 동성연애자 아니, 양성연애자 야?"

나는 자리에서 일어서며 나지막이 하지만, 강단 있게 입을 열었다.

편집장님, 제가 누구를 사랑하는 게 편집장님에게 해가 되나요?”

아니, 뭐 그런 건 아니지만 그래도 이런 내용을 잡지에 실으면 회사 이미지도 있고……”

나는 미리 준비한 사직서를 편집장에게 건네며 말했다.

편집장님, 그 동안 고마웠어요!”

, 이게 뭐에요?”

나는 그에게 가벼운 목례를 건네고 내 물건을 담은 상자를 들고 사무실을 빠져 나가기 시작했다. 그러자 뒤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뭐야? 나 선배 동성애자였어?”

거봐, 내가 그랬잖아, 레즈비언 같다고!”

나 선배 블로그 장난 아니다. 벌써 댓글 엄청 달렸는데!”

, 진짜 머리카락 또 빠지게 생겼네!”

그들의 웅성거림을 듣자니 피식 웃음이 나왔다.

와이프 몰래 두 집 살림하는 편집장, 남편 몰래 어린 대학후배와 바람 피우는 배 기자, 결혼을 앞두고 내 몸만 탐한 정수 등 과연, 그들이 남의 사랑을 옳다 그르다 논할 자격이 있을까? 다시 한번 더 누구를 사랑하느냐 보다 사랑을 얼마나 진실되게 하느냐가 더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상에 달은 오직 하나뿐인데 사람들은 종종 자기 눈에 보이는 달과 보이지 않는 곳에 있는 달은 왠지 다를 거라는 착각을 한다.


지하 주차장에서 차를 몰고 지상으로 나오자 햇살이 참 예뻤다.

라디오에선 때맞춰 비틀즈의 ‘Here comes the sun’ 이란 노래가 나왔다.

오랜 만에 보는 예쁜 햇살을 마음껏 즐기기 위해 일부러 선글라스도 쓰지 않았다.

아니, 어찌 보면 햇살은 늘 예뻤는지 모른다. 다만, 나한테 그 예쁜 햇살을 바라 볼 마음의 여유가 없었을 뿐……

그때였다. 핸드폰 벨 소리가 울려 보니 희진이었다.

지금 어디야?” 전화기 너머에서 들려오는 그녀의 목소리가 밝았다.

공항으로 가는 중이야!” 나 또한 밝은 목소리로 답했다.

내가 시골집에 간 사이 희진이는 내 대신 은미를 찾아가 그 동안 우리가 궁금해 했던 것들에 대한 설명을 들을 수 있었다고 했다.

고등학교 때 그 일이 있고 난 후 얼마 안 있어 은미는 유학이란 명분하에 어머니에 의해 유럽으로 보내졌다고 했다. 은미는 나에게 연락하고 싶었지만 자기 엄마가 한 일이 너무 엄청나고 미안해서 차마 그럴 수 없었다고 했다.

부모의 권유로 유학 중 만난 지금의 남편과 결혼했지만 지금껏 단 한번도 나를 잊고 산 적이 없다고 했다. 그래서 아이도 갖지 않았다고 했다.

은미 또한 자신의 성 정체성을 밝히고 당당하게 세상과 맞서고 싶었지만 그로 인해 상처받을 부모님 때문에 그러지 못했다고 했다. 하지만, 지난 겨울 부모님 모두 돌아가시고 난 후부터는 내 앞에 나설 준비를 하고 있었다고 했다.


은미한테 말은 했는데 온다는 대답은 듣지 못했어.” 희진이가 말했다.

그래? 알겠어. 그럼, 공항에서 보자.”

그래, 운전 조심하고!”


희진이와 나는 오늘 브라질 코파카바나 해변으로 여행을 간다.

대학생이 되면 은미와 함께 가려고 했던 바로 그곳, 코파카바나!

은미도 함께 갈 수 있으면 좋겠지만 그녀가 올지 안 올지는 아무도 모른다.

은미의 동행 여부를 생각하자 또 다시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마치, 오래 전 은미와 함께 ‘해피 투게더’라는 영화를 보고 났을 때처럼 말이다.

코파카바나에 가면 나는 제일 먼저, 은미가 하고 싶었던, 코파카바나 달빛 아래 유키 구라모토의 ‘루이스 호수’를 연주할거다. 호수에 갇혀 지낸 답답함을 벗겨주고 넓디 넓은 바다의 무한자유를 느끼게 해주기 위해서 말이다!

잠시 후 공항에 도착한 나는 주차를 마치고 공항 안으로 발걸음을 옮기기 위해 출입구 문을 두 손으로 활짝 밀고 들어갔다.

내가 지금 밀고 들어간 것은 단순한 문이 아니었다.

그것은 세상편견에 맞서 살아가야 할 내 삶의 제 2막을 통과하는 문이었다.

쉽지는 않겠지만 그 누구보다 더 행복하게 살리라 마음 먹었다.

문득, ‘은미가 올까?’라는 생각이 들자 약속장소로 향하는 내 발걸음이 점점 더 빨라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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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pyright코파카바나에 뜨는 달All rights reserved by S. H. Lee / 2010.


작가소개

이상희

해외문학 신인상 (시)

중앙 신인 문학상 (소설) 

현재 미국에 거주하며 소설, 시나리오 집필 등 작품활동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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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ww.chiglestor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