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Season 1/vol. 1

[십대가비십대에게] 40년 후의 진기에게.

당신. 오랜만이야 큭큭.
그쪽의 안부가 궁금해. 누구와, 무엇을, 어떻게 지내고 있는 걸까?
머리가 길고 냄새가 좋고 하루에 빵을 다섯 번 구워주는 일본인 여자와 마침내(!)살게 되었을까? 부치의 숙명으로 공주님 발을 씻기며 사는 걸까? 아니면 고독과 우수의 이미지를 갖춘 시크한 환갑을 보내고 있는 걸까?
(마흔이 넘도록 살아있어 준 것에 감사해. 나는 내가 지나친 소심증이나 생리혐오증으로 - 혹은 수염이 너무 갖고 싶어서!- 죽어버리면 어떻게 하나 걱정했다.)
굳이, 이쪽의 안부를 전하자면.
나는 같이 사는 여자들과의 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어.
일 년이 지났지만, 엄마는 ‘그거’ 인 나를 여즉 용서하지 못했고, 동생은 간혹 나의 정체성을 들먹거리며 상처를 주는 것이 자신이 불리할 때 쓸모 있다는 걸 깨달을 만큼 똑똑해졌다. 그다지 유쾌한 동거는 못 된다. 어쩔 수 없지. 이것 또한 ‘나쁜 여자’더라도 사랑할 수밖에 없는 부치의 운명인 것을 크윽ㅜ
뭐, 같은 시공간에서 복작거리는 것이 집 안에서의 일 뿐은 아냐
당신도 알다시피, 5년 전의 나는 아무것도 모르고 떵떵 살았다. 그래서 갑자기 ‘벌컥, 나 있었소’ 하고 장롱구석에서 튀어나온 ‘요상하고 반사회적인’ 녀석과 잘 지내게 되기까지 3년이 걸렸다. 먹은 게 없어 여기저기 욕구만 토하고 다니던 그 녀석이 예전의 나보다 훨씬 유쾌한 녀석이라는 걸 왕왕 깨달을 쯤엔 고3이었고 뱃속에서 위와 췌장이 서로 잡아먹지 못해 부글댔다. 내 위와 장은 앞으로도 별로 좋은 룸메이트가 못 될 것 같다.
쌍꺼풀수술을 하고 구두를 신으며 훌쩍 커버린 여자애들을 졸업식 날 보면서는 세상과의 동거(同去)도 쉽지 않을 것을 깨달았다. 나는 선머슴애같은 -심지어 삭발까지 한!-계집애다. 공공화장실을 갈 때마다 머리 길이로 내 남근의 여부를 판단하는 사람들과 마주치며 어디에 내 삶이 끼어들 수 있는지 우울해졌다.
그럴 때면 ‘동네 아이들에게 직접 구운 쿠키를 나눠주는 게이할아버지가 꿈’ 이라던 지인의 말을 떠올 리게 된다. 나는 그게 좀 갑갑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지금 이곳엔 동성애자를 위한 어떤 정당한 제도도 나를 위한 엄마의 이해도 없다. 도대체 수십 년을 내가 또각 구두와 결혼에 맞서 살아야 한다는 건 어떤 걸까. 얼마나 더 많은 상처를 더 받아야 레즈비언 할머니(라고 쓰고 할아버지라고 읽는다)가 되는 걸까.
하지만 나는 반드시 L로 늙고 싶다.
꽃게이를 너무 사랑한 나머지 게이로 전향한 레즈비언의 결혼식에도 가고 싶다. 환갑잔치에 게이 코러스가 왔으면 좋겠고 이벤트로 드랙쇼를 봤으면 좋겠다. 당신은 그렇게 살고있어?
물론, 우리가 가족을 구성할 수 있는 권리를 얻게 되고, 내 친구의 자식들이 학교에서 성소수자가 무엇인지 배울 수 있다면 그건 정말 좋은 일이겠지. 심지어 내가 그런 역사들의 증인으로, 주체로써 지켜볼 수 있다면 더욱 기쁠거다. 하지만, 그렇게 되든 아니든, 레즈비언이란, 퀴어란 정체성은 얼마나 유쾌한지!
아무 것도 변하지 않을 것처럼 보일 때에도 우리들 중 누군가는, 그리고 우리 모두는 사랑하는 누군가와 혹은 세상과 자기 자신과의 동거를 시도해왔다.
그러한 음모의 수작들조차도, 누군가에게 맞서거나 싸우는 방법들이 아니었다. 우리는 대신 축제를 했다. 함께 섞여 들어간다. 세상에 색을 입힌다. 나는. 우리는.
그것이 몹시 자랑스럽다. 그렇게 나는 내 정체성 위에 꿋꿋이 주름을 더해 갈거다.
엄마와 동생, 그리고 내 뱃속과는 한동안 잘 지내지 못할 것 같다.
지금은 몹시 수줍지만 내가 당신의 나이가 되기 전에 그들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할 수 있었기를 빈다. 그리고 당신도, 당신의 아내(我內)와 여전히 잘 지낼 수 있기를.
- 아직 너무 어린 진기로부터 -
추신 : 종종 세상에 ‘삐대기’ 버거울 때 지혜를 빌려줬으면 해. 가령,
하루에 빵을 다섯 번 구워주는 가슴이 이쁘고 냄새가 좋고 머리가 긴 이쁜 일본인여자는 어디서 만날 수 있는가, 라던가(뒷일은 알아서 잘할게)

글.진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