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ason 1/vol. 1

[동거특집] 그래 나 동거 좀 해봤다.

AhnZ 2009. 5. 28. 23:40
그 사건(?)의 전말을 이랬다. 오랜만에 대학동창들을 만난 자리였는데, 머리도 나쁘고 눈치도 없는 남자 동기 녀석이 나에게 “결혼은 정말 안할 거냐?”라고 물었다. 그 녀석은 결혼한 지 3년이 넘어 어느새 아이 아빠가 되어있었는데, 거기다 대고 내가 한 대답은 이랬다. “결혼은 말고 동거는 몇 번 해봤지” 순간, 분위기는 정말 싸해졌다. 몇 초 후 선배가 “세다...”라고 한 마디 했는데, 그때야 나는 상황을 깨달았다. 레즈비언 계(?)에선 한 두 번의 동거는 흠이 되지 않지만, 헤테로 계에서는 이건 꽤 큰 스캔들이라는 것을! 아뿔싸. 나는 그렇게까지 솔직하고 싶지는 않았는데 헤테로 남자들과 하도 오랜만에 만나다 보니 그만 (일반의) 감각을 잃어버렸던 것이다. (-_-;;;)

이 사건을 계기로 곰곰이 생각해보니, 이성애자들 사이에서의 ‘동거’와 동성애자들의 ‘동거’는 상당히 다른 지형의 경험인 듯 하다. 일반화시키려는 것은 아니고 주위 경험들을 통한 대략의 경향을 살펴보면 이런 식인 게다. 이성애자의 경우에는 일단 어느 정도의 나이가 되면 상대를 진지하게 생각하느냐의 여부는 곧장 결혼과 이어지게 된다. 아무리 10년을 넘게 사귀었어도 그 관계가 결혼으로 이어지지 않으면 “그러게 아무것도 모를 때 결혼을 했어야 한다”는 둥, “너무 오래 끌면 안된다”는 둥 지난 연애의 기억들을 모두 궁극적으로는 ‘결혼실패’라는 카테고리 안에 넣어버린다. 여기에서 동거는 아주 특이한 형태거나 남에게 쉽게 알리지 않는 사실이거나 혹은 알려졌을 때는’결혼을 전제한 동거’라는 설명이 반드시 따라붙게 된다. 이렇게 이성애자들에게 동거는 보통 결혼 전 단계에서 경험하는 것이거나 젊은 시절의 치기이자 오점쯤으로 생각되는 듯 하다. 특히 동거 자체가 여전히 터부시되는 한국에서는 더욱 동거는 시도하기 쉽지 않거나 말할 수 없는 경험으로 생각된다. (그러니 나의 이성애자 친구들이 저리 화들짝 놀란 것이렸다.)

이에 비해, 동성애자들 사이에서의 ‘동거’는 연애의 연장선상에서 언제든지 시작할 수 있는 것으로 좀 더 캐쥬얼하게 받아들여지고 있는 편이다. 오히려 데뷔 10년쯤 되었는데 한번도 동거 경험이 없다면 뭔가 심각한 집안 사정이 있거나 혹은 연애에 진지하지 않은 사람이라고 생각되지 않는가! 그러고 보니 전에 여행지에서 만났던 캐나다인 J가 그쪽에서 통용되는 레즈비언 조크를 소개해줬는데 “첫날 반해, 두 번째 만남에서 사귀기 시작하고, 세 번째는 호텔에 가고 한달 뒤에서는 같이 산다”는 것이다. 움...하나도 웃기지 않았다. 하지만 동성커플의 동거가 급속하게 이루어지는 편인 건 여러모로 세계적인 현상인 모냥이다. (그런데 어디에 비해 급속하다는 것일까? 이성애자들은 사귀고 나서 석 달 만에도 잘도 결혼하더라)

사실 이렇게 동성애자들이 비교적 쉽게(?) 동거를 시작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다. 많은 동성애자들이 결혼압박으로부터의 피신을 위해 이십대 후반부터는 가능한 독립하고자 하는 상황인 데다가. 마침 둘 다 혼자 살고 있다면 경제적 이유에서라도 동거를 생각하게 되기 마련이다. 심지어는 너무 당연시 되어있기 때문에 전 애인과의 동거 경험이 별로 안좋았다거나 혹은 집안이 엄하다는 이유로 동거하지 않는 커플들은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주위로부터 “아직도 따로 사냐”는 무언의 압력조차 받게 되기도 한다. 서른까지 한번도 동거를 하지 않았던 나는 줄곧 친구들에게 “연애에 진지하지 않은 것 아니냐”는 의혹을 받았어야만 했다! 이성애자와는 이렇게나 다른 문화적, 사회적 지형 속에 있는데도 그러한 차이가 이해되기 보다는 동성애자들은 너무 문란하다느니 쉽다느니 어쩌구들 하는 것은 정말이지 몰상식한 일이다. 그렇게나 많은 이성애자들이 심지어는 몸도 안땡기는데 결혼씩이나 하는 게 이상하면 더 이상하지 않은가. 결혼생활 얘기는 그렇게나 끝도 없이 나오는데, 왜 내가 동거 좀 해봤다고 해서 그렇게나 놀라시는지 원.

글.H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