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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3 L-NOLLAN?!/#4 바이

[바이] 칼럼 / 하나보다 더 많아도 괜찮은 것

하나보다 더 많아도 
괜찮은 것

글. 진기

솔직히,
 처음 본 그녀는 너무 예뻤다. 집에 돌아와서 잠을 설쳤다. 그런데 바이섹슈얼이라고 했다. 나보다 더 길고 많은 그녀 연애사의 반은 남자라고 했다. 쿨한 척 ‘아, 그래요?’ 라곤 했지만. 어쩐지 마음속엔 찝찝함 들이 남았다. 
나의 전 애인처럼, 그녀도 ‘남자’ 에게 간답시고 나를 뻥 차버리진 않을까? (그러나 왜, 다른 여자를 사귀는 것보다 다른 남자를 사귀는 것이 더 기분이 나쁠까)  ‘남자’ 라는 그 믿음직하지 못한 족속과 사귀었다니. 정말 그녀는 괜찮은 사람인 걸까? (그러나 왜, 여자를 사귀었던 건 별로 신경 쓰이지 않는 걸까) 사실은 동성애자인데 바이섹슈얼이란 ‘과도기’를 겪는 미숙하고 비겁한 사람은 아닐까? (안젤리나 졸리는 미숙하고 비겁할까?) 바이섹슈얼들은 문란하다던데 그녀도 문란하지는 않을까 ? (동성애자들은 문란하다던데, 나도 문란하지는 않을까) 그래도 역시 남자랑 뽀뽀를 했다니, 그거 좀 찝찝하다... (내가 그녀와 뽀뽀를 할 때도 그런 생각을 떠올리게 될까?)

 사실은 그런 게 진짜 문제가 아니었는지 모른다. 내가 그렇게까지 남자를 ‘믿음직하지 못한 족속’ 이라고 생각하게 된 건 마초적인 말투나 행동보다도, 전 애인이 다른 남자를 만나겠다며 떠나갔을 때 나의 ‘그녀’를 앗아간 남자들에게 엄청나게 화가 났던 기억 때문일지도 모른다. 내가 바이섹슈얼이 아직 동성애자로 감히 정체화 하지 못한 동성애자라고 여긴 것은 내가 한때 이성애자 호모포비아들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나를 억지로 남자도 좋아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어차피 호모포비아 눈엔 동성애자나 양성애자나 똑같이 문란한 변태로 보였을 텐데 내가 왜 그 고생을 했을까. 
 아니면 그것과는 또 다른 이유였을 수도 있다. 사실 내가 바이섹슈얼에 대해 가지는 감정들은 어쩌면 “당신은 필요하다면(?) 남자를 만날 수도 있겠지? 난 머리부터 발끝까지 동성애자로 보이기 때문에 안 돼” 라는 시기심이거나 “나는 우리 아빠 빼면 남자라곤 좋아하기 힘들던데, 당신 눈에는 어떻게 남자가 여자만큼 아름답게 비칠 수 있지?” 라는 의문이거나 “나에게는 적인데다가! 치마를 입지 않는다는 이유로 나를 꺼림칙해하는 남자들이 - 당신은 좋아해주고 사랑해준다고?”라는 질투였을 수도 있다. 
 내 맘속에 남은 찝찝함이 무엇이었든 간에, 그녀가 너무나 멋진 사람이었기 때문에 나는 홀랑 빠져버렸다. 그 이후에 몇 년간 내가 그저 섹시한 이성애자라고만 믿고 있던 어릴 적 친구들이 나에게 양성애자라고 커밍아웃 해오면서 오히려 나에겐 “아, 바이섹슈얼이란 섹시하고 당돌하고 멋진 사람들이구나!” 라는 편견(?)이 생겨버렸다. 이제는 나의 애인이 된 그녀의 나보다 ‘하나 더 많은’ 성적취향의 가짓수에 대해서도  “나는 곧 죽어도 물냉이지만, 당신은 끌리면 비냉도 선택할 수 있는 사람” 정도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

 그러고 보면 아마도, 세상에는 굳이 정해져 있지 않아도 괜찮은 것들이 있는 것 같다.
가령 내가 여자뿐 아니라 남자까지 질투해야 한대도 - 그 수가 워낙에나 많으면 소용없는 것이고.(여자 50명이나, 거기다 남자 50명을 더해서 100명이나 상관없는 거다 흑) 그녀와 내가 몇 년간 연애를 하면서 그녀에게 이성애자임을 가장해야 했던 ‘필요한 순간’ 이 왔음에도 -그녀는 여자인 내 곁에 남았고, 그녀가 남자나 여자 모두를 사랑할 수 있대도- 지금도 앞으로도 그녀가 오직 단 한 사람 나만을 아름답게 보아주고 사랑한다면, ‘나보다 하나 더 많은 성적취향’은 상관없는 게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