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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ason 1/vol. 2

[다르게상상하기] 할매! 엘할매!

레즈비언 어린이, 레즈비언 청소년, 레즈비언 처녀, 레즈비언 아줌마 그리고 레즈비언 할머니! 레즈비언으로서 당신의 삶을 세월에 따라 배열해본다면 아마 위와 같을 것이다. 물론 사람들은 레즈비언이란 걸 모르고 어린이는 마냥 순진해야하고, 청소년시기엔 이성에 눈떠야 하고, 처녀는 얼른 시집가라고 하고, 남편은 어디있냐고 물어보겠지만 이런 저런 우여곡절을 다 지나고 마침내 할머니가 될 것임은 너무나도 분명하다.

지금의 레즈비언 커뮤니티가 너무 젊은이들 중심이라는 비판과 우려의 목소리가 있다. 하지만 이것은 딱히 레즈비언만의 문제는 아니다. 게이들도 마찬가지고 넓게는 대한민국 전체가 안고 있는 문제이기도 하다. 고령 인구는 급속도로 늘어나고 있는데 고령자의 삶에 대해서는 관심도 별다른 사회적 대책도 없다. 그래서 모두 ‘노후’를 무섭게만 느낀다. 하지만 무서워한다고 늙지 않는 것도 아니니 차라리 적극적으로 고민하자. 이런 차원에서 지난 호에선 노후에 대한 규모를 다르게 상상하자고 제안했다면 이번 호에서는 약칭 ‘L 할매’로 어떻게 폼나게 살 것인가를 상상하자고 꼬드겨보려 한다.

일단 크게 세 가지를 제안한다. 섹스, 패션, 그리고 우정.

섹스를 그만 두어야 할 나이란 없다. 늙음과 동시에 반드시 성욕이 감퇴하는 것도 아니다. 30대 커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별로 섹스를 않는다고 하는데 사는 일에 팍팍할 때는 그럴 수도 있다. 섹스는 정력보다는 사실 마음의 여유와 더 밀접한 관련이 있지 않은가.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체온을 나누는 스킨쉽은 항상 필요하다. 뽀뽀하고 키스하고 껴안고 쓰다듬고 다정함을 속삭이는 일들 말이다. 그러니, 할머니들의 새로운 섹스 세계, 필살기- 주름살 황홀하게 애무하기 등등 미리 상상할수록 늙어서 즐거울지어라!!

부치 할머니들의 패션도 중요하다. 나이가 들수록 특히 부치들의 옷입기가 쉽지 않다. 젊어서는 꽃부치 소리라도 듣지만 나이가 들면 들수록 ‘유니 섹스 모드’의 옷들은 사라져가고 더욱 더 분명한 남녀구분의 패션세계에 허덕이며 평범한 아저씨나 할아버지 같다며 눈총받기 쉽다. 부치 할머니들을 위한 패션쇼가 필요하다. 할머니 패션의 다양성 발전을 위해서라도 부치 패션의 자존심을 이어나갈 수 있도록 이것도 미리 여러 상상을 해보자.

또한, 이성애중심적인 노인학교를 탈피한 여성 중심의 노인 학교도 필요하다. 어쩌면 게이 할배와의 우정도 늘그막에 필요할지 모른다. 그때쯤엔 배타적이고 독점적인 연애가 아닌, 농도짙은 우정을 여러 명의 친구들과 나누며 함께 늙어감을 즐기게 되진 않을까. 늙음과 죽음이 맞닿는 중에 먼저 보내줘야 하는 사람도 생기고 그때마다 눈물 흘리게 될지 모르지만 떠나는 자도 남은 이의 걱정을 덜 할 수 있을테니 역시나 함께 늙어갈 우정은 꼭 필요하다.

꼬부랑 할매로서, 레즈비언으로서 우리의 삶은 쭉 이어진다. 지금까지는 레즈비언 세대가 단절되어 있어서 머리 희끗한 레즈비언을 만나기 어려웠지만 앞으로는 다를 것이다. 퀴어 퍼레이드에 백발의 커플이 손을 잡고 걷는 모습도 곧 보게 되지 않을까. 나이가 들어가는 것에 대해, 레즈비언 할매로 살아가는 풍경에 대한 상상이 필요하다. 그런 상상들로 가슴이 벅차다. 레즈비언 할머니로서의 자신을 상상하기! 상상이 곧 힘이다! 와우!

글.한채윤(한국성적소수자문화인권센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