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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ason 1/vol. 2

[세대탐방] 레스보스 김명우사장님

그리고 레즈비언이 있었다 - 70년대 명동 레즈비언 이야기

사람의 기억이라는 것은 참 신기하다. 기억은 자신만의 생명력을 가지고 있는 듯하다. 어떤 일들은 기억하게 하고, 어떤 일들은 잊게 한다. 어느 때에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 나오는 시계토끼처럼 애타게 기억해내려고 하는 일들을 품고 달아난다.
기억은 내게 일어나지도 않았던 일들을 그리워하게도 한다. 또 하나의 놀라운 일이다.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레즈비언 바인 <레스보스>의 사장님이기도 한 김명우님을 만나 1970년대 명동이야기를 들으면서 이런 경험을 하게 됐다. 한번도 경험해보지 않았으므로 그리워할 수도 없었던 70년대 명동 이야기를 80년대생인 내가 들으면서 그 시대로 ‘돌아가고픈’ 마음이 들었다.
물론 그 시대 명동에 대해 모두 알고 싶은 건 아니었다. 다방 전성시대였던 1970년대 명동에 있었던 수많은 음악다방들과 이 곳들을 드나들었다는 예술가들의 이야기.금융과 패션의 중심지. 명동성당이 위치한 덕분에 유신 시대 민주화 운동의 터전이기도 했던 곳. 1970년대 는 많은 사람들에 의해 이렇게 다양한 모습으로 기억되고 있다. 그러나 명우님이 들려준 70년대 명동 이야기는 대중에 의해 기억되지 않는 기억이다. 명우님의 70년대 명동은, “담배연기에 둘러싸여 여자들 뿐이었던” 여성 전용 다방들이 등장하는 공간이었다. 명동의 이른바 ‘정사’에는 기록되지 않는 곳들이었다. 알고싶어졌다.

명우님이 처음으로 출입하게 된 이른바 ‘여성 전용 다방’은 “샤넬”이라는 곳이었다. 명우님이 18세 때 접한 공간이었다. 명우님은 처음 한 경험에 “기겁”했다고 한다. “뼛속까지 레즈비언”인데다가 중, 고등학교 때 학교에 소문이 자자할 정도로 연애를 했던 명우님이었다. 그런데도 여성들만 모여있는 다방은 충격이었 나보다. 명우님이 자주 레즈비언바를 출입하게 된 것은 고등학교를 졸업한 이후였다. 그즈음 처음 샤넬을 소개해줬던 고등학교 친구가 “명우님과 같은 사람”을 소개시켜줬다. 당시 수도사대 (지금의 세종대학교) 회화과에 다니던 학생이었다. 아버지가 강력계 형사였는데 고등학교 때까지는 얌전하게 지내다가 대학에 들어와 자유를 맛보고 드디어는 “레즈비언”까지 알게 된 사람이었다. 처음 만난 날 대뜸 입에 뽀뽀를 했던 대담한 학생을 통해 명우님은 또다른 레즈비언을 알게 된다. “완전 여자” 였던 ‘치마씨’ 회화과 여학생과는 달리, 남자 못지 않게 키가 크고 잘생긴 ‘바지씨’였다 (당시에는 지금의 ‘팸’을 ‘치마씨’라고 불렀고, ‘부치’를 ‘바지씨’라 일컬었다) . 명우님이 명동 레즈비언들의 세계를 본격적으로 경험하기 시작한 건 이 바지씨와의 만남 이후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때부터 명우님은 ‘샤넬’이외에도 ‘PJ’ ‘나폴레옹’ ‘나란히’’겨울 나그네’와 같은 레즈비언바들에 드나들었다. 같은 정체성을 지닌 사람들을 만나기 힘들었던 시절, 그곳들은 레즈비언들에게 해방의 공간이었다. 그때 맺어진 친분은 질기고도 오래가는 것이어서 레즈비언바들이 하나 둘씩 문을 닫고, 명동이 재개발되면서 레즈비언들의 중심지가 이동한 뒤에도 이어져오고 있다고 한다.

명우님은 바로 며칠 전 함께 명동에서 어울렸던 사람에게서 받았다는 문자 메시지, 일본에 있는 명동 시절 선배 한 분에게서 매 년 받는 엽서와 같은 것들에서 끈끈함을 느낄 수 있었다.

여기서 의문이 생겼다. 명동 레즈비언들에 대한 억압은 없었을까. 명우님이 명동에 드나들던 70년대는 폭력적인 시대였다.말 한마디 잘못하면 반항 한 번 못하고 형을 살아야했던 시절이었다. 이런 정치적인 폭력이외에 좀 더 물리적인 폭력도 가까이있던 시대였다. 70년대 명동은 정식 명칭 ‘조직 폭력배,’ 일명 ‘조폭,’ 좀 더 흔하게는 ‘깡패’들이 위세를 떨치던 곳이었다.
50-60년대 까지는 일명 두목 신상현이 이끄는 ‘신상파’가 명동을 장악했다. 그런데 1975년 지금도 명동에 있는 사보이호텔의 결투에서 ‘범호남파’가 회칼과 쇠몽둥이로 신상파를 누르면서 판도는 바뀌었다. 그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 ‘범호남파’는 호남에서 올라온 폭력배들로 이뤄졌다. 범호남파 일당은 명동 곳곳에서 다방을 비롯한 여러 업소들을 운영했다. 명우님의 명동시절에서 중요한 공간이었던 PJ도 호남의 조직폭력배가 운영하던 곳이었다. 이곳을 드나들던 레즈비언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지 겁이 날 법도 했다. 아니나다를까, PJ가 매일같이 레즈비언들로 북적대자 그곳 사장이 이들을 쫓아내기도 했다. 레즈비언에 대한 시선이 어땠는지 가늠할 수 있다.

그렇다고 기죽을 레즈비언들이 아니었다. 명우님의 표현으로 당시 “재래종”이었던 남성들과는 달리, 함께 어울리던 레즈비언들은 평균 신장 170 cm인데 운동신경도 뛰어났다고 한다. 명동 양장점에서 맞춰입은 남성복을 입고 다니는 이 ‘우월한’ 체격의 레즈비언들은 주먹 좀 쓴다는 남자들의 자존심을 건드린 것 같다. 폭력배들은 종종 시비를 걸어왔다. 레즈비언들이 이에 대처한 방식은 뒷날 무용담으로 회자될 것이었다. 명우님이 ‘꼭지형’이라고 부르는 사람의 이야기가 특히 인상적이었다. 한번은 ‘꼭지형’이 남자같이 행세를 하고 다니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긴 폭력배들이 칼을 휘두르며 나타났다. 그리고는 식탁위에 올려져있던 꼭지형의 새끼손가락을 내리쳤는데, 손가락이 끊어지지 않고 ‘달랑’거리자 그 꼭지형은 아예 손가락을 끊어냈다고 한다. 이를 본 폭력배들이 그 뒤로 꼭지형을 형님으로 모셨다는 일화다. 70년대의 레즈비언들이 이른바 ‘남성’과 같은 모습을 하고, ‘강해진’ 이유는 삶의 표현 방식이기도 하면서 레즈비언으로서의 삶의 방식을 지켜내려는 수단이 아니었을까. 더이상 부치들의 무용담을 듣기 힘든 시대에 드는 생각이다.

그럼에도 70년대의 레즈비언들은 오늘날의 레즈비언들과 마찬가지로, 사회에 근본적으로 내재돼 있는 억압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 결혼과 사회적인 편견은 개인 혹은 몇몇의 힘으로 극복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무용담은 거기서 끝났다. 술집에 가면 사람들이 “쟤네들 남자일까 여자일까”내기를 했고, 커피숍에 가면 “저 레즈비언들은 무슨 재미로 살지” 원치도 않는 걱정을 해주는 사람들 때문에 조용히 빠져나와야 했다. 명우님을 처음으로 PJ에 이끌었던 멋있는 바지씨는 갑자기 결혼을 해버렸다. 애인들도 모두 결혼을 해버렸다. 명동 시대도 영원할 수는 없었다. 여성 전용 다방들이 사라지고 사람들은 모두 흩어졌다.

‘명동 레즈비언 시대’는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 하지만 한 시대의 중요성을 겨우 ‘지속 기간’이라는 기준 하나로만 평가할 수는 없을 터. 70년대 명동이 중요한 이유는 시대가 열어주는 새로운 가능성 때문이다. 70년대에 서울 명동에서 레즈비언들의 삶이 있었다면 서울이 아닌 다른 곳에서도 아직 우리가 알지 못하는 레즈비언들의 삶이 있었을 것이고, 60년대에도 그러했을 것이고, 앞선 시간들에도 레즈비언들의 독특한 삶이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있었다. We are everywhere(우리는 어디에나 있다)를 We were everywhere(우리는 어디에나 있었다)로 확장시킬 수 있는 가능성을 70년대 명동에서 발견하게 된 건 아닐까.

인 터 뷰 어 . 복 어 알
다가오는 여름,
세 번 먹히지 않을까 두려움에 떨고 있는 복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