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잘 몰랐던 바지씨, 치마씨
그리고 부치와 팸의 어원
부치(butch)와 팸(femme)이란 말은 많이 쓰는데 정확히 어원을 아는 경우는 별로 없어. 저 멀리 태평양을 건너온 말인데 우리가 어찌 어원까지 알겠어. 사실 그거 모른다고 해서 쓰지 말란 법도 없고 말이야. 하지만 뭔가 뒤져보면 더 재밌지 않을까 싶어서 일단 위키피디아를 찾아봤어. 부치는 1940년대부터 ‘남자같은 레즈비언’을 뜻하는 단어로 쓰였다는데, 직접적인 유래는’butcher(도살자/푸주간주인)”에서 나왔을 거라는군. 혹 그거 알아? 폴 뉴먼과 로버트 레드포드가 나온 유명한 영화 “내일을 향해 쏴라”의 원제가 “Butch Cassidy And The Sundance Kid”라는 거. 여기서 “부치”는 갱단 두목의 닉네임이야. 이 전설적인 두목이 한때 푸주간에서 일했는데 그 덕분에 얻은 별명이 ‘부치”였어. 이 사람은 1904년에 죽은 사람이니 우린 이 단어가 ‘tough kid’(거친 녀석 정도로 보면 될까?) 의미로 쓰이다가 40년대에 이르러 ‘남자같은 여자’로 발전했으리라 유추할 수 있지.
팸은 익히 알려졌듯이 프랑스어로 여성을 뜻해. 아마 “팜프파탈(famme fatale)”이라고 하면 확 느낌이 오지. 아내를 뜻하기도 하지만 속어로 여자역할을 하는 동성애자를 뜻하기도 해. 그럼 이 부치와 팸은 언제부터 한국에서 쓰이기 시작했을까? 이건 지금은 확정해서 말할 수는 없어. 연구와 조사를 해봐야 하니까. 하지만 대략 90년대 중반부터 쓰였던 것은 확실해. 우리나라에 주한외국인레즈비언모임인 <사포>가 만들어진 것이 1991년이고, 한국 최초의 동성애자인권운동모임인 <초동회>가 결성된 것은 1993년이거든. 이 초기 활동가중에 미국에서 건너오신 분들도 있었으니 이후 만들어지는 레즈비언 커뮤니티에서 부치와 팸이란 단어가 자연스럽게 쓰였겠지. 내가 1996년 3월에 처음 레즈비언 커뮤니티에 들어섰을 때 이미 사람들이 부치니 팸이니 라고 물어봤으니까 말이야. 80년대와 70년대 때 자신이 동성애자임을 아셨던 분들에게 여쭈어보면 그땐 부치와 팸이란 단어 몰랐다고 하시거든.
자, 그럼 이전에 뭐라고 했을까, 아마 아는 친구들도 있을 거야. 4,50대 이상의 레즈비언들은 ‘바지씨’와 ‘치마씨’라고 했다고. 이번에 자료를 찾다가 흥미로운 걸 알았어. 이 단어가 레즈비언들만 쓰던 은어가 아니라는 거지. 1978년 4월 21일자 동아일보 기사를 보면 이런 구절이 나와. “60년대 학생들이 애인을 통칭했던 바지씨가...(후략)” 즉 남자애인을 뜻하는 단어로 바지씨라고 흔히 썼다는 거지. 또 2000년에 정리된 청소년 은어 목록을 보다보니 여자애인을 뜻한다며 ‘치마씨’가 있더라구. 즉 일반적으로 남자, 여자를 지칭하던 바지씨, 치마씨라는 말을 레즈비언들이 가져다 썼음을 알 수 있어.
90년대 말부터 2000년대초엔 야오이 만화의 영향을 받은 ‘공/수’라는 표현이 쓰이기도 했지. 이건 게이 커플을 지칭하는 말이기도 해서 레즈비언들 사이에 오랫동안 널리 쓰이진 않았어. 또 부치와 팸의 중간으로 ‘전천’이라는 말도 있지. 어떤 기상조건에서도 제 기능을 다한다는 의미의 ‘전천후 全天候’에서 온 말이라고 추측하는데 정확한 건 좀 더 조사해봐야겠지. 요즘은 부치라고 길게 말하는 대신 그냥 “비(B)”라고도 해. (참, 10대들 사이에서는 아마도 영어 철자에 대한 오해가 있었는지 팸을 F가 아닌 P로 줄여 부르기도 하더라)
오늘은 여기까지. 내년에도 레인보우링 매거진이 계속 나온다면 1년 후에 더 풍부한 자료로 역사소개를 할 수 있었으면 좋겠어. 그때까지 더욱 열심히 조사!! 연구!! ^^;;
글.한채윤